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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후포면의 한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 인적이 드문 도로 옆에 덩그러니 놓인 단칸방. 문을 열자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경직된 표정의 지적장애 모녀, 정은순(49) 씨와 딸 조하나(27) 씨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평 안 되는 작은 집에는 공기청정기, 제습기 등 가전제품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이 죄다 사놓은 것이랬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만 남아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집 안 곳곳에는 가전제품 연체료를 알리는 고지서가 널브러져 있었다. 남편이 떠난 뒤 모녀에게 남겨진 건 빚더미 뿐이었다.


◆좀처럼 벗어날 수 없던 사기의 굴레…남편은 가출
한때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믿음직한 남편이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 남편은 곧장 돈을 잘 벌어오는 사업가였다. 다만 은순 씨는 그런 남편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사람을 잘 믿고 퍼 주기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남편은 작은 사기를 당하는 일이 잦았다.


상처만 가득했던 서울을 떠나 새로 자리 잡은 경북 울진군 후포면. 새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남편은 알선업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고 물건을 사고팔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의 물건까지 팔아 주겠다 가져갔지만 사기만 당하기를 반복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의 갈등도 커졌다. 궁지에 몰린 남편은 15년 전 집을 나가버렸다.


남편이 떠난 집에는 엄마와 딸만 덩그러니 남았다. 지적장애로 온전한 일을 해보지 못한 은순 씨는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풀을 뽑고, 쓰레기를 청소하는 공공근로를 전전하며 하루 일당으로 6년을 버텼다. 남편이 새로운 여자와 살림을 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빚 독촉을 알리는 고지서들도 물밀 듯 밀려오는 탓에, 깊은 우울증이 은순 씨를 덮쳤다.


참 염치없는 사람이었다. 꾸역꾸역 살아가던 두 모녀 앞에 남편은 몸이 아프다며 8년 만에 불쑥 나타났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은순 씨는 남편을 내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딸의 하나밖에 없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은 울진에서 서울 병원을 오가며 병수발을 들었지만 남편은 당뇨 합병증, 패혈증에 시달리다 결국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남긴 빚만 3천만원…건강까지 악화
또다시 집에는 엄마와 딸만 남았다. 남편이 없는 세상, 이제 이들은 의지할 존재가 서로밖에 없다. 하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모녀는 당장 글을 잘 읽지도 못한다. 딸 하나 씨는 어린 시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겉돌기만 했다. 특수반도 없던 시골의 학교 수업 시간, 하나 씨는 교실 대신 늘 운동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하나 씨는 어느덧 30대를 바라보지만 아직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녀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은순 씨는 지난 1년간 질 출혈이 계속됐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어 단순 월경이라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얼마 전 교회 도움을 받아 찾은 병원에서 자궁암 3기임을 알게 됐다. 교회 지원으로 겨우 자궁을 뗄 수 있었지만 은순 씨는 암이 언제 재발할지 몰라 늘 불안 속에 산다. 은순 씨와 함께 병원을 찾은 하나 씨도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몸에 지방이 축적되는 쿠싱 증후군과 당뇨,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행복할 날만 있어도 모자랄 모녀의 앞날엔 남편이 남기고 간 3천만원의 빚이 턱하니 놓여있다. 게다가 남편이 생전에 무작정 사놓고 간 제습기, TV 모니터, 정수기, 비데 할부금도 밀려 쌓여가고 있다. 한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걸 악용한 판매원에게 사버린 공기청정기 렌털 비용도 부담을 더한다.


한 달 100만원 남짓한 기초생활수급비가 전부인 두 모녀에겐 월세와 생활비, 빚을 더한 큰 금액이 숨을 죄어온다. 은순 씨는 "이제 욕심도 없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이들에게 피해만 줬다. 이 빚만 다 갚을 수만 있다면…. 이제 남한테 더이상 피해주지 않고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가슴을 쳤다.


배주현 기자 pearz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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